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귀인 홍씨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1617년(광해 9) 후궁 간택에서 [[귀인 윤씨|윤홍업의 딸]]과 함께 선발되어 숙의(淑儀)로 [[http://sillok.history.go.kr/id/koa_10908008_001|봉작되었다.]] 본래 [[내명부]]의 예법에 따르면 숙의는 세 명만을 둘 수 있는데, 광해군은 홍씨를 포함하여 다섯 명이나 두어서 비판받았다. 또한 여러 후궁의 일족들이 관직에 제수되고 은총을 받았다고 한다. 홍씨는 이듬해인 1618년(광해군 10년)에 소의(昭儀)로 품계가 [[http://sillok.history.go.kr/id/koa_11007008_006|올랐으며,]] 이후 귀인(貴人)으로 한 단계 더 승격되었다.[*A 서치상. (2020). 광해·인조 연간의 해인사 수다라장과 법보전 상량문 연구. 건축역사연구, 29(1), 65-76.][* 정확한 진급 시기는 미상이나 1622년(광해군 14년)에 귀인으로 칭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그 이전에 귀인에 봉작된 것으로 보인다.] 한편, 귀인 홍씨의 아버지 홍매는 [[고양시|고양]][[군수]]였다가 딸이 후궁이 되자 연안부사가 되었고, 홍주목사의 자리까지 올랐다. 1619년(광해 11년) [[황해도|황연도]](黃延道)[* 1616년(광해군 8년) 황해도를 황연도(黃延道)로 고쳤으나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도로 황해도가 되었다. ] 순안 어사 한명욱(韓明勖)이 홍매가 [[가렴주구]]를 일삼는다 하여 탄핵하였으나 광해군은 처벌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. 당시 기록에 따르면 홍매가 세력을 믿고 재물을 탐하여 가는 곳마다 고을을 텅 비게 만들었다고 한다. 1623년(인조 1년) [[인조반정]]이 일어나자 홍매는 [[강릉]]에, 귀인 홍씨는 [[보령]]에 [[유배]]되는 처분을 받았다. [[분류: 조선의 후궁]][[분류:1601년 출생]][[분류:풍산 홍씨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